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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요

권기옥

by 교육주의보 2023.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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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옥 애국지사 : 대한민국 최초 여성 비행사, 항일운동가, 독립운동가 (1901-1988)

 

권기옥 동상
권기옥 동상 (국립항공박물관 건립 : 2020.07.03)

 

 


가명 :  임국영(林國英)으로 활동하셨습니다.

1919년 평양에서 만세시위운동(3.1 운동) 참가
1920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서 활동
1925년 윈난육군항공학교 졸업 후 중국군에 근무하며 독립운동 지원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사교부장으로 활동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1988년 서울 장충동 2가 191의 4의 낡은 목조건물 2층 마루방에서 여생을 보내고 작고 후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셨습니다.

안장 장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197번


 

“저는 비행사가 되어 조선 총독부 건물을 폭파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일왕의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고 싶습니다.”

 

권기옥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입니다. 영화 청연의 주인공인 박경원이 한국 최초 여성 비행사로 잘못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박경원은 민간 여성비행사이고, 권기옥 선생님이 한국 최초 여군비행사입니다. (중국군 소속이긴 합니다)

 

1901년에 태어난 권기옥 선생은 

 

1917년 1917년 5월에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A. Smith)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를 꿈꾸기 시작합니다.


1918년 숭의여학교에 입학합니다.

1919년 졸업반이던 권기옥 선생은 숭의여학교 교사인 박현숙 선생님의 권유로 비밀결사대 ‘송죽회’ 가입하여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평양에서 1919년 3.1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송죽회'는 숭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여성 독립운동 단체입니다. 3.1 운동에 참가한 이유로 체포되어 3주 동안 구류되었고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인 김순일, 김정직, 김재덕, 임득삼 등과 임시정부 공채 판매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하였습니다. 6개월 형기를 보내고 평양청년회 여성전도대를 조직하였으나, 경찰 감시가 심해져 상해로 망명합니다.

1921년 항공학교 입학 전 중국 홍따로 여학교에서 2년 2개월 동안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923년 4월에 졸업 후 독립전쟁을 위한 군관 양성을 추진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중국의 변방인 윈난육군항공학교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항공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는 각오를 하였습니다. 

 

  • 윈난육군항공학교 입학 배경

두 곳의 항공학교에서는 여자라는 이유로 입학 불가를 통보하였고 다른 한 곳에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남은 학교는 중국 서남쪽 끝에서도 변방에 있는 윈난성의 항공학교뿐이었습니다. 서류만 보내서는 거절당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권기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시영 선생의 추천서를 품고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한 달 만에 윈난성 쿤밍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추천서를 들고 윈난성의 지역 권위자 탕지아요를 만나 자신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평소 한국의 독립운동을 호의적으로 보았던 탕지아요는 비행사가 되기 위해 먼 거리를 개의치 않고 찾아온 권기옥의 용기에 탄복하여 입학을 허가하였습니다. 

탕지아요(唐繼堯) : 중국 윈난성의 지역 군벌로서 군인이자 정치가.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고 한국의 독립운동과 국권 회복을 적극 지지한 인물입니다. 또한 한국인들이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였습니다.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924년 7월 첫 단독 비행에 성공한 후 기념사진은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냈고, 항일 운동을 향한 강한 투지를 담은 내용의 편지도 함께 보냈습니다. 윈난육군항공학교에서는 프랑스에서 구입한 20대의 비행기에 2명의 프랑스 교관이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맹훈련을 하였습니다. 선생은 인내를 갖고 열심히 조종술을 익혔고, 기초이론과 지상 실습교육을 끝낸 후 프랑스제 꼬드롱 쌍첩 훈련기를 처음 타보았습니다. 여성 조종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것이 한국 여학생이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망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권기옥 선생 암살 시도가 이루어졌고 이런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선생은 학교 안에서만 생활하였다고 전해집니다.

 

 

 

 

1928년 2월 28일 윈난육군항공학교 제1기 졸업생으로 유일한 여성으로 학업을 마치게 됩니다.
그 해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개벽, 1926)라는 시를 쓴 항일 민족 시인 이상정의 형 이상화 선생과 결혼하게 됩니다.

 

 

새싹인물전 권기옥 편
새싹인물전 권기옥 편

 


1930년경부터는 중국 공군에 합류하여 항일활동을 하게 됩니다.

중국군과 함께 하게 된 배경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활발히 활동했고,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의 감시를 덜 받아서 중국 군에서 독립군을 키워 항일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국군과 힘을 합쳐 일본을 저항하는 것이죠. 우리나라에는 애석하게도 항공학교가 없어 중국군에서 항공에 대한 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1932년 상하이 사변에서 공을 세워 무공 훈장을 받습니다.


1938년 충칭 육군 참모 학교의 교관이 됩니다.


1943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공군 설계 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중경 임시정부 직할로 김순애, 방순희, 최선엽, 최애림, 최형록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였습니다. 사교부장으로 활동한 선생은 한국여성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 전열에 참가시키고 여성들의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였습니다.  이후 광복 후인 1949년 28년 만에 귀국하였습니다.

 

이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약하며 공군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출판사를 운영하며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곳에 와서 비행기를 타려는 뜻은, 그저 개인적인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건 필요 없다. 비행기 운행을 배우는 까닭은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다. 비행기 안에 폭탄을 싣고 장차 일본으로 날아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 윈난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여

  "혁명 여성들은 당파나 사상을 묻지 않고 일치단결하여 애국부인회를 재건함으로써 국내와 세계만방에 산재한 일천 5백만 애국여성의 총단결의 제1성을, 그리고 3천만 대중이 쇠와 같이 뭉쳐서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대한독립과 민족해방 완성의 제1보를 삼으려 한다.”

- 대한애국부인회 선언문 중에서

  “중일전쟁 때 상해 상공에서 폭격비행도 했지만 나의 소망이었던 조선총독부 폭격은 끝내 못해본 것이 한이라오.”

- 1979년 8월 29일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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